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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책읽는사회문화재단 &gt; 웹진(생각하는 사전)</title>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link> 
		<dc:language>ko</dc:language>
		<item>
			<title>미성년 - 칸트</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1-11-09 10:38:34</b></td></tr></table><br /><br /><P>&nbsp;</P>
<P><FONT style="BACKGROUND-COLOR: #000000"><FONT color=#000000><FONT style="BACKGROUND-COLOR: #ffffff"><FONT style="BACKGROUND-COLOR: #000000"></FONT></FONT>&nbsp;</P></FONT></FONT>
<P>칸트는 근대 이전의 역사 전체를 미성년이라고 규정한다.<FONT color=#156200> </FONT><FONT color=#8f0197>미성년이란 </FONT></P>
<P><FONT color=#8f0197>"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FONT></P>
<P>지금까지 인류는 교회나 봉건 영주의 율법에 따르는 예속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다. </P>
<P>칸트는 근대철학자로서 근대인이 미성년의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즉&nbsp;계몽될 것을 권고한다. </P>
<P>그렇다면 인류는 미성년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nbsp;수 있을까? 그는 "미성년의 원인이 이성의 </P>
<P>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결단과 용기의 결</P>
<P>핍에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계몽의 모토는 다음과 같다. </P>
<P><STRONG><FONT color=#d40a00>"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nbsp;</FONT></STRONG><STRONG><FONT color=#d40a00>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FONT></STRONG></P>
<P><STRONG><FONT color=#d40a00></FONT></STRONG>&nbsp;</P>
<P><FONT color=#000000></FONT>&nbsp;</P>
<P><FONT color=#000000>- 진은영.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FONT><FONT color=#000000>법정에 세우다』 그린비, 2004. 38쪽.</P>
<P>&nbsp;</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712</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1-11-09 10:38:34</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슬럼(slum) - 이영석</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8-05 15:05:42</b></td></tr></table><br /><br /><P><FONT size=2><FONT size=2>&nbsp;&nbsp; 끝으로, 이스트 엔드와 관련해 '슬럼slum'이라는 언어의 기원을 살필 필요가 있다. 원래 이 말은 도시 빈민가를 가리키지 않았다. 어원상으로 영어의 '슬럼'은 수렁 또는 진창의 뜻을 가진 '슬럼프slump'에서 나왔다. 저지대 독일어나 스웨덴어에서 '슬람slam'은 오늘날에도 수렁을 뜻한다. 이 말이 19세기에 도시 빈곤 지역을 가리키게 된 것은 영국 산업화의 특수한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 영국의 면 공장은 수력을 이용하는 데 편리한 산간 지방에 자리 잡았다. 그 후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사용하면서 공장은 석탄을 나르기가 쉬운 강변과 운하, 즉 저지대에 세워졌다. 특히 랭커셔 면업 지대 공장들은 주로 운하 옆 낮은 지대에 위치해 있었고 그에 따라 그 주위에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인 공장촌이 들어섰다. </FONT></P>
<P><FONT size=2>&nbsp;&nbsp; 이는 이전에 구릉 지대에 몰려 있던 수력공장의 풍경과 매우 다른 것이었다. 증기력공장과 새로운 공장촌은 애초부터 우기에 배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지대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처음에 슬럼이라는 말은 우기에 배수가 잘되지 않는 주거지를 가리켰을 것이다. 주민은 대부분 초기 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그러나 철도의 시대에 이르러 그 말은 좀 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공장들이 집중된 공업 도시들이 성장하고 공장 주변 여기저기에 대규모 노동자 주택단지가 들어섰을 때, 이 말은 이전과 달리 가난한 빈민과 하층민이 살고 있는 열악한 주거지를 상징하게 된 것이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이영석. 『영국, 제국의 초상』. 푸른역사. 2009. </FONT>116-7쪽. </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176</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8-05 15:05:42</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가언(假言)명령, 정언(定言)명령 - 마이클 샌델</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7-09 10:56:57</b></td></tr></table><br /><br /><P><FONT size=2>칸트는 언제나 조건이 따라붙는 가언명령을 조건 없는 명령인 정언(定言)명령과 대조한다. "어떤 행동이 다른 것의 수단으로만 바람직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가언명령이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따라서 이성에 부합하는 의지에 꼭 필요하다면, 이때의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정언'이라는 말이 전문 용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흔히 쓰는 말과 아주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은 조건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정치인이 떠도는 추문을 '정언적'으로 부인한다면, 단지 강한 어조로 부인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조건 없이, 어떤 흠결이나 예외도 없이 부인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정언 의무나 정언 권리는 특정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의무나 권리를 뜻한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역. 김영사, 2010. 167-8쪽.</P>
<P>&nbsp;</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104</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7-09 10:56:57</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아카데미아(Academia) - 이인경</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7-02 10:31:46</b></td></tr></table><br /><br /><P><FONT size=2>&nbsp;&nbsp; 서양 역사의 물길을 따라가보면 인류 최초의 대학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아카데미아Academia일 것이다. 훗날 이 단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학문의 집'을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FONT></P>
<P><FONT size=2>&nbsp;&nbsp; 아카데미아를 설립한 인물은 철학자 플라톤Platon이다. 그는 기원전 387년 아테네 근교에 철학을 가르치는 사설 학원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아를 설립하고 제자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원래 정치에 뜻을 두었던 그였지만 스승 소크라테스Socrates가 독배를 마시고 죽는 것을 목격한 뒤에는 정치에 환멸을 느껴,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다. </FONT></P>
<P><FONT size=2>&nbsp;&nbsp; 아카데미아에서 가르치는 과목은 철학과 수학, 동식물학, 천문학 등이었는데, 오로지 앉아서 연구만 하거나 스승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방식이 아니었다. 생활공동체였던 아카데미아에서 플라톤과 제자들은 대화와 토론으로 수업을 해나갔다. 플라톤이 심신이 조화된 인간이 교육을 통해 길러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형이라고 보았던 만큼, 아카데미아에서는 지식의 습득을 넘어선 인격적인 면모를 다듬는 공부에 무게를 두었다. 학문이 적극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주변국으로 정치적인 자문을 해주기 위해 파견을 나가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왕의 스승으로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바로 이 아카데미아 출신이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이인경.&nbsp; 『역사 in 시사』. 북하우스. 2009.&nbsp;50-1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96</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7-02 10:31:46</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엘렌코스(elenchos) - 김용석</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6-10 10:55:42</b></td></tr></table><br /><br /><FONT size=2>&nbsp; 다음은 엘렌코스, 곧 논박술을 살펴보자. 이것은 상대방의 주장을 조목조목 따지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 고유의 방법이라기보다는 모든 토론과 논쟁에서 고대로부터 사용해오던 것이다. 소피스트들도 상대가 내놓은 명제를 일단 의심하고 세세히 검토하여 그 안에서 오류와 자가당착을 발견해내는 방법을 즐겨 사용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방법을 극단으로 몰고 간 경우이다.</FONT>
<P><FONT size=2>&nbsp;&nbsp; 소크라테스가 지속적으로 유지한 태도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전문가들이 자기 분야에서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의심하는 것이다. 소피스트는 덕(德)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것을 의심한다. 훌륭한 전략가는 군사기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시인은 시와 영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것들을 의심한다.&nbsp;</FONT></P>
<P><FONT size=2>&nbsp;&nbsp; 소크라테스는 의심으로 드러난 것들을 노닐적 시험과 반박으로 검증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대화 상대자가 정말로 알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안다고 믿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를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nbsp;그가 논박술을 쓰는 이유는 상대가 반대 의견 앞에서 설득력 있게 답변할 수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오류의 목록을 작성하여 그것을 논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nbsp;</FONT></P>
<P><FONT size=2>&nbsp;&nbsp;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은 오류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극단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nbsp;</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김용석. 『서사철학』. 휴머니스트, 2009. 167-8쪽.&nbsp;</FONT></P>]]></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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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6-10 10:55:42</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시오니즘 - 김재명</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6-03 11:53:26</b></td></tr></table><br /><br /><P><FONT size=2>"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자"는 움직임을 '시온주의' 또는 '시오니즘'이라 일컫는다. '시온'이란 팔레스타인에 있는 고대 예루살렘의 한 언덕 이름이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시오니즘이란 결국 그 옛날 예루살렘에 있던 언덕을 상징적인 목표지로 삼아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민족주의 운동인 셈이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김재명.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프로네시스, 2009. 145-6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71</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6-03 11:53:26</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헤게모니 - 이택광</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5-27 12:05:45</b></td></tr></table><br /><br /><P><FONT size=2>요약하면, 그람시는 이데올로기를 민중을 통합시키는 관념, 믿음, 재현, 실천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이는 헤게모니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헤게모니는 계급이나 정치집단 등 사회정치 단위 사이에서 발생하는 알력 같은 것인데, 이 개념은 개인들이 단순하게 정치를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만들어내고 자신들을 위치 짓는 조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정통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생각은 상당히 놀랍다. 왜냐하면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계급으로 통합되어 나타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현실의 실천을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한국에서도 쉽게 목격되는데, 가령 시장주의와 경제 개방을 표방하는 한나라당 같은 보수 정당을 노동자들이 지지하는 현상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분명히 이들은 계급적으로 노동계급에 속하지만, 부르주아 정당의 정책에 동의하고 있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이택광.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글항아리, 2010. 58-9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62</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5-27 12:05:45</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테일러리즘 - 김기협</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5-20 11:31:19</b></td></tr></table><br /><br /><FONT size=2>&nbsp;&nbsp; 위기에 처한 개인의 대응 자체는 위기를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근본적 위기라면 인생관을 바꿔야 한다. 일시적 위기로 인식한다면 당분간 하고 싶은 일 참고 하기 싫은 일 하며 지내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근본적 위기란 것을 아예 인식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위기는 요령만 잘 피우면 넘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FONT>
<P><FONT size=2>&nbsp;&nbsp;&nbsp;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서양 사회를 풍미한 테일러리즘은 세상의 어떤 문제든 기술적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 능률지상주의였다. 개인의 요령지상주의와 같이 가치관의 반성을 마비시키는 풍조였다.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20세기의 극단성이 가치관의 경직 현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인간 지성의 오만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회진화론과 테일러리즘에서 그 뿌리르 찾을 수 있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김기협. 『페리스코프』. 서해문집, 2010. 133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54</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5-20 11:31:19</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GNR혁명 - 레이 커즈와일</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5-10 14:21:33</b></td></tr></table><br /><br /><P align=left><FONT size=3><FONT size=2>&nbsp;21세기 전반부에 우리는 세 개의 혁명이 꼬리를 물고 중첩되어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유전학의 혁명, 나노기술의 혁명, 로봇공학의 혁명이다. 그로써 내가 제 5기라 칭한 시대, 즉 특이점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지점은 'G (유전학)'혁명 초기 단계다. 우리는 생명이 간직한 정보 처리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인체의 생물학을 재편하는 법을 익히고 있다. 질병을 근절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극적으로 넓히고, 수명을 놀랍도록 연장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중략] 'N (나노기술)'혁명은 생물학의 한계를 넘어 우리가 몸과 뇌, 그리고 세상을 분자 수준으로 정교하게 재설계하고 재조립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가장 강력한 혁신은 'R (로봇공학)'&nbsp;혁명이다. 즉 인간의 지능을 본받았지만&nbsp;인간의 능력을&nbsp;한껏 뛰어넘도록&nbsp;강력하게 재설계된 인간&nbsp;수준 로봇들이 등장할 것이다.&nbsp;R혁명은&nbsp;가장 의미있는 변화다. 지능이란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지능은 제대로 발달하기만 한다면 자기 앞에 놓인 어떤 장애물이라도 쉽게 내다보고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것이다.</FONT>&nbsp;</FONT></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김명남, 장시형 역. 김영사, 2007. 277-78쪽.</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48</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5-10 14:21:33</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정부 - 아리스토텔레스</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5-06 13:54:16</b></td></tr></table><br /><br /><P align=left><FONT size=2>정체와 정부(politeuma)는 사실상 같은 뜻이다. 정부는 국가의 최고 권력기구(to kyrion)인데, 최고 권력기구는 필연적으로 한 사람, 소수자 또는 다수자에 의해 대표된다. 한 사람, 소수자 또는 다수자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하는 정부는 올바른 정부다. 그러나 한 사람, 소수자 또는 다수자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정부는 잘못된 정부다. 국가가 제공하는 이익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는 시민이라고 불리지 말든지, 시민이라고 불리면 당연히 이익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FONT></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천병희 역. 도서출판 숲, 2009. 151쪽. </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45</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5-06 13:54:16</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수력사회 - 이븐 라코스트</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5-03 12:13:03</b></td></tr></table><br /><br /><P><FONT size=2>수력 사회들(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 무슬림 에스파냐)은 관개농업을 위한 대규모 설비 시설이나 더 넓게는 다양한 목적의 대공사를 특징으로 한다. 이 대규모 공사는 주민 전체에 의해 시행되고 관료층의 감독을 받는다. 주민들은 공동체의 상위 이익을 군주가 개인적으로 집행하면서 누구나 노역을 맡도록 만든 체계에 구속되어 있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이브 라코스트. 『이븐 할둔』. 노시경 역. 알마, 2009. 57쪽.</P>
<P align=left>&nbsp;</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40</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5-03 12:13:03</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역학적 문화, 발생된 문화 - 리처슨, 보이드</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29 10:36:33</b></td></tr></table><br /><br /><P><FONT size=2>진화심리학자 레다 코스미데스(Leda Cosmides)와 존 투비(John Tooby)는 그들이 명명한 문화로 가득 찬 '표준사회과학 모델'(Standard Social Science Model)을 비판하면서 '역학적'(epidemiological, 혹은 전달된[transmitted]) 문화와 '발생된'(evoked)문화를 구분했다. 역학적 문화라는 것은 우리가 단순히 문화라고 하는&nbsp;것을 가리킨다. 부연하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각각 다른 관념과 가치를 습득하여 발생한 사람들 간의 차이를 말한다. 발생된 '문화'라는 것은 전달받지 않았는데도, 지역적 환경에 의해 발생한 차이를 가리킨다. 코스미데스와 투비는 사회과학자들이 말하는 문화가 실은 발생된 문화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독자에게 많은 음원과 어떤 프로그램이 있어서 지역에 따라 다른 곡이 연주되는 주크박스를 상상해보라고 했다. 그렇다면 브라질에 있는 모든 주크박스는 하나의 곡을 연주할 것이며, 영국에 있는 모든 주크박스도 다른 한 곡을 연주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유전자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은 장소에 따라 다른 곡을 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투비와 코스미데스는 인류학자와 역사학자가 역학적 문화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하며, 인간 사회의 변이의 상당 부분은 유전적으로 전달된 정보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여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nbsp;</P>
<P align=left><FONT size=2>- 피터 J. 리처슨, 로버트 보이드. 『유전자만이 아니다』 김준홍 역. 이음, 2009. 95-6쪽.</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32</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29 10:36:33</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번역(translation) - 레이 초우</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26 14:21:51</b></td></tr></table><br /><br /><P><FONT size=2>1.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번역(translation)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한편으로는 '전통'(tradition), 다른 한편으로는 '배반'(betrayal)과 연관되어 있다. 이탈리아어의 트라두토레(traduttore, 번역자), 드라디로레(tradirore, 반역자)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번역이라는 일에는 배신이라는 경멸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nbsp;[중략] 번역에 관한 고전적 사고에서는 기표가 아니라 기의가 우선시된다고 존슨은 기술하고 있다. "텍스트에 대한 충실함은 의미론적인 대요(大要)에 대한 충실함을 뜻하며 전달수단의 구속에서 기인하는 간섭은 최소한으로 억제되어왔다. 다시 말하면 번역이란 언제나 의미의 번역이었던 것이다." (273-4쪽)</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righ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2. </FONT></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번역은 "어느 것이 일차적이고 어느 것이 이차적인가?"라는 언어의 존재론적 서열을 즉각적으로 문제 삼는 활동이기 때문에 기원과 파생물에 관한 가장 오래된 편견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예컨대 번역을 '자연스러워' 보이게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번역은 좀더 '오리지널' 같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인가? '오리지널'은 그것이 번역된 언어와는 다른데도? '오리지널'과 닮았다는 것은 번역이 '오리지널'과 닮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된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으면 번역은 그것이 번역되는 언어에 보다 가까운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일까? 그럴 경우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것은 '기원'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가 경멸조로 "이것은 번역투다"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것은 '오리지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는 이해할 수 있어도 그것이 번역된 것임을 알아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이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오리지널'이 아니라 번역된 것이기 때문에, 두 갈래로 나뉜 모든 의미작용과정처럼, 번역은 '오리지널'이라는 개념, '오리지널'과 그 '파생물'의 관계,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요구가 철저하게 재조사되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275쪽)</FONT></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레이 초우. 『원시적 열정』. 정재서 역. 이산, 2004.&nbsp; </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27</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26 14:21:51</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가이아 - 박홍규</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22 14:46:11</b></td></tr></table><br /><br /><P><FONT size=2>&nbsp;&nbsp; 그리스 신화의 처음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여신이 생명의 모태로 숭배받던 원시 모권사회의 흔적이다. 이는 인도-유럽어족이 그리스에 이주하기 전에 그리스에 살던 선주민의 펠라스고이 신화에서 태초에 만물의 어머니인 에우리노메 여신이 오피온이라는 뱀과 어우러져 우주의 알을 낳았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가이아 중심의 모권제사회는 기원전 3천 년에서 2천 년 사이에 인도-유럽어족인 그리스인에 의해 정복되었다. </FONT></P>
<P><FONT size=2>&nbsp;&nbsp; 부신(남신)들이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 유일 여신인 모신은 처녀수태로 우주에 생명체를 탄생시킨 강력한 창조신으로서 생명-죽음-부활(하늘-대지-지하)의 기능을 가지고, 처녀-어머니-노파의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그 뒤 모권신화에 곡물과 대지가 첨가된 것은 모든 고대 농경사회의 공통된 흔적이다. 그런 신화의 모신은 구석기시대부터 숭배된 흔적이 남아 있고, 신석기시대에는 동물사육과 식물재배가 시작되어 다산과 풍요, 그리고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모신이 더욱더 숭상되었다. 이러한 모신숭배는 고대 그리스를 포함한 남동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다. 모신의 상징은 뱀, 나무, 달 등이었고 그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는 가이아였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박홍규. 『그리스 귀신 죽이기』. 생각의 나무, 2009. 98-9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24</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22 14:46:11</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노동시장의 노동자 범주 - 지그문트 바우만</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19 17:24:21</b></td></tr></table><br /><br /><P><FONT size=2>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오늘날 노동시장에 네 가지 범주의 노동자가 존재한다고 했다. 먼저 '상징 조작자들', 다시 말해 아이디어의 창조자, 홍보인, 전파자, 그리고 판매자들이 있다. 두 번째가 주로 모든 분야와 수준에 종사하는 교육자들로, 이들은 고용 가능한 노동력(곧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구매되어 소비되기에 알맞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주요 역할을 맡고 있다. 세 번째 범주는 '개인 서비스'(소비자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주로 행해지는)에 고용된 이들로 구성된다. 이들은 상품판매자들, 그리고 상품 구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범주는 '단순 노동자들routine labourer'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조립라인이나 그 '새롭고 진보된' 변형인 자동화 기기들, 예를 들면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서 일하는 이들이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지그문트 바우만. 『새로운 빈곤: 노동, 소비주의 그리고 뉴푸어』. 이수영 역. 천지인, 2010. 117-8쪽. </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21</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19 17:24:21</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 윌러드 게일린</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13 11:11:57</b></td></tr></table><br /><br /><P><FONT size=2>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가 있다. 이 말은 남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을 말한다. 샤덴프로이데는 시기의 반대이다. 시기가 남의 즐거움으로 인한 고통, 예를 들면 낙원에 있는 아담과 이브를 보는 사탄의 고통인 반면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으로 인한 기쁨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지체 높고 능력 있는 사람이 추락할 때 어떤 기쁨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추락은 단순히 그들의 능력과 우리의 능력 사이의 차이를 줄여 줄 뿐이다. 하지만 샤덴프로이데는 더 심한 문제이다. 시기와 샤덴프로이데는 동전의 양면이며 항상 함께 나타난다. 심한 경우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잘되는 것마저도 위험과 굴욕으로 여긴다. 이는 마치 인생을, 타인의 상승이 곧 나의 하락인 시소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윌러드 게일린. 『증오』. 신동근 역. 황금가지, 2009. 85쪽. </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17</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13 11:11:57</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소키에타스 - 샹탈 무페</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08 17:27:28</b></td></tr></table><br /><br /><P><FONT size=2>하나의 목적에 의해 정의된 하나의 공동 기획에 참여하는 행위자들의 결사체인 우니베르시타스 모델과는 반대로, 소키에타스 혹은 '시민 결사체'는 공동의 행위에 의한 어떤 실체적 관계가 아니라 규칙들에 의한 형식적 관계를 지시한다. "소키에타스의 관념은 선택에 의해서건 환경에 의해서건 각 인격체들이 일정 유형으로 정체성 형성이 가능한 결사체를 조직하기 위해 서로 관계하는 행위자들의 관념이다. 행위자들을 결합해 주며 이런 관점에서 각자 자기 자신을 구성원[소키우스]socius으로 인정해 주는 결속은, 공동의 실체적 목적을 추구하거나 공동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한 하나의 기획에 참여하는 관념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충성의 관념이다." 따라서 그것은 공동의 행위에 의한 관계의 한 양식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행위의 일정 조건들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서로 관계하는 하나의 관계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샹탈 무페. 『정치적인 것의 귀환』. 이보경 역. 후마니타스, 2007. 109-10쪽.</P>
<P>&nbsp;</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12</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08 17:27:28</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공적 광장론 - 카스 R. 선스타인</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4-05 11:27:18</b></td></tr></table><br /><br /><P><FONT size=2>언론의 자유라는 원리는 포괄적인 접근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공적 광장론은 공원과 거리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포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즉, 이 이론의 중요한 특징은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장소를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이다. 만일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이 공공 거리에서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싶다면, 그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공공 거리는 집회가 목표로 삼는 장소와 대체로 근거리에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이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대상에 대해 사실상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 카스 R. 선스타인.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박지우, 송호창 역. 후마니타스. 2009. 170-1쪽.</FONT></P>]]></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4005</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4-05 11:27:18</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정보사회론, 지식사회론 - 심광현</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3-29 13:15:01</b></td></tr></table><br /><br /><P><FONT size=2>90년대 중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지식사회' 또는 '지식기반사회'에 관한 담론은 한동안 '정보사회론'과 경합을 벌이다가 2000년대 이후에는 확고하게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보에서 지식으로의 방점 변화에 불과해 보이지만, '정보사회론'에서 '지식사회론'으로의 지배 담론의 변화에는 겉보기보다는 중요한 의미가 깔려 있다. </FONT><FONT size=2>'정보사회론'이 정보통신혁명에 의해 산업구조 전반이 재편되는 과정, 즉 IT 기술이 산업과 사회적 인프라 전반에 깔리게 되는 하드웨어적 · 소프트웨어적 변화에 초점을 둔 담론이라면, '지식(기반)사회론'이란 그렇게 정보화된 사회를 기반으로 가능하게 된 새로운 방식의 지식생산과 소통의 등장에 역점을 두는, 즉 새로운 지식(콘텐츠)의 창조에 초점을 둔 담론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식사회론'에서 말하는 지식은 정보인프라가 깔리기 이전의 근대적 지식생산이 아니라 이미 지구화된 정보인프라를 기반으로 생산되는 새로운 형태의 지식을 뜻한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심광현.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문화과학사, 2009. 248-9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3999</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3-29 13:15:01</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item>
			<title>위계질서 - 박호성</title>
			<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tr height="27"><td><b>책사회</b></td><td align="right"><b>2010-03-25 10:51:48</b></td></tr></table><br /><br /><P><FONT size=2>하지만 우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최대 모순의 하나는, 한편에서는 평등 및 인간적인 정(情)으로 진하게 어우러진 '공동체 의식'과, 다른 한편에서는 불평등과 비인간적인 상하 관계로 잘 길들여진 '위계질서'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위계질서는 국가의 관료제도 뿐만 아니라 기업, 언론, 교육기관 등등 사회 구석구석마다 속속들이 똬리를 틀고 박혀있다. 이 완강한 위계질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공동체적 단합을 뿌리째 뒤흔들어놓는 병원체로 암약한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에는 '이웃사촌(공동체 의식)'과 '양반·상놈(위계질서)'이 더불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FONT></P>
<P><FONT size=2></FONT>&nbsp;</P>
<P><FONT size=2></FONT>&nbsp;</P>
<P align=left><FONT size=2>- 박호성. 『공동체론』. 효형출판, 2009. 31쪽.</P></FONT>]]></description>
			<link>http://www.bookreader.or.kr/test/webzine.php?mid=22&amp;r=view&amp;uid=3993</link>
			<dc:creator>책사회</dc:creator>
			<category><![CDATA[생각하는 사전]]></category>
						<dc:date>2010-03-25 10:51:48</dc:date>
			<dc:subject></dc:subject>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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