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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1-11
    [2011-01-07] 행복의 역설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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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사람들의 입에, 언론매체에 부쩍 자주 오르내리는 화두 가운데 ‘행복의 역설’이란 것이 있다.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말할 만한 외적 조건들이 상당한 수준에서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행복감은 늘지 않는다는 것이 행복의 역설이다. 이런저런 조사 결과들을 보면 행복감은 늘기는커녕 되레 줄어드는 것으로 나와 있다. “나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보다는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한국인이 몇 배나 더 많다. 부(富), 수명, 삶의 질, 의료시설, 안전망, 교육수준 등 측정 가능한 객관적 지표로 따지면 행복의 조건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향상되었다고 말해야 할 시대에 오히려 불행감을 느끼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면 이건 어찌된 일인가? 역설도 이 수준에 달하면 단순 역설이 아니라 ‘미스터리’ 아닌가?


    이 역설 혹은 미스터리에 가장 민감한 것은 우선 정치권이다. 이해할 만하다. 국민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정치가 반드시 써먹어야 하는 대국민 연애술이다. 행복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행복의 정치학’을 동원하지 않는 정치세력은 사실상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 ‘행복도시’의 구호가 방방곡곡 걸려 있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런데 국민 행복을 높이려는 정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행복을 외쳐대면 댈수록 사람들은 왜 더 불행해지는가? 이건 또 무슨 역설인가? 정치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인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은 행·불행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많은 경우 ‘불행’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말한 적이 있다. 한국인은 불행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가? 아니면 한국인은 자기가 충분히 행복한데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백성인가? 행복한 상태에 있으면서 행복을 모른다면 그것은 무지이거나 자기기만이다. 한국인은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 혹은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가?


    최근 한국인의 행복감 결여를 다룬 어떤 신문의 정초 특집을 보면 이 ‘무지’의 문제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지금의 한국인은 객관적 조건으로 보아 반드시 불행감을 느껴야 할 처지에 있지 않다, 한국인이여,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러니 제발 불행감을 떨쳐내고 “나는 행복하다”고 좀 말해주렴. 그 특집의 안팎에는 이런 소리들이 깔려 있다. 신문의 정초 복음 같기도 하고 대국민 호소 같기도 한 그 소리를 듣다 보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 상태에 있는가를 모르는 무지한 백성이라는 느낌이 든다. 당신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그 자격을 알고 인정하라, 그러면 당신은 당당히 행복해질 것이고 한국인의 행복을 만방에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을 느낄 이유가 없는데 왜 불행감에 잡혀 있는가? 이런 복음은 행복의 역설, 혹은 불행감의 감옥에서 한국인을 풀어주는 해방의 메시지 같은 것이기도 하다. 해방의 메시지라, 고맙지 않은가.

    고맙긴 하지만 인문학적 관점에서는 생각할 것이 많다. 정치 못지않게, 그러나 좀 다른 이유에서 인문학도 행복의 역설이라는 문제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의 왕할아비 반열에 드는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까지 올려 세운 사람이다. 물론 그가 말한 행복(에우다이모니아)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행복과는 다른 것이긴 하지만 바로 그 ‘다른 점’ 때문에, 현대인의 불행감이라는 문제를 뚫고 나가고자 시도하는 사람이라면 아리스트텔레스적 행복론을 참조하는 일이 아주 요긴하다. 행복 혹은 ‘좋은 삶’에 대한 그의 사유를 현대적으로 각색하면 이런 것이 될 수 있다. “영혼이 병들면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을 다시 행복의 역설에 적용하면 이러하다. “행복의 외적 조건이 제 아무리 잘 구비되어도 병든 영혼으로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인문학의 본질 화두에 속하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응답이 가능하다. “영혼이 병들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물론 이것은 그 본질 질문에 대한 정답이 아니라 한 가지 응답이다.


    행복의 역설 못지않게 현대인의 행복을 좀먹는 것은 ‘행복추구의 역설’이다. 행복의 외적 조건이 개선되었는데도 행복감은 늘지 않는다는 것이 행복의 역설이라면, 추구하면 할수록 행복은 멀리 달아난다는 것이 행복추구의 역설이다. 이 추구의 역설 문제는 행복의 역설 못지않게 중요하고 그래서 당연히 인문학의 관심사에 속한다. 추구하면 할수록 행복이 달아나는 것은 그 추구의 방식이 ‘슬픈 영혼’의 방식일 때이다. 슬픈 영혼에게는 만사가 휴의이다. 그런데 무엇이 병든 영혼이고 무엇이 슬픈 영혼인가? 영혼은 어느 때 병들고 슬퍼지는가?


    이 질문을 생각해보는 것이 이 칼럼의 다음 번 과제이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인문학적 사유의 책임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그 인간은 우선 우리들 자신이고 ‘나’ 자신이다. 나는 내 행복에 책임을 지고 있다. 내 영혼의 안녕과 건강을 보살필 책임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있다. 그 ‘나’ 속에는 ‘우리’가 포함된다. 나를 빼면 우리가 없고 우리가 없으면 나도 없다. 이것은 집단주의인가? 아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적 사유의 지혜는 개인주의냐 집단주의냐의 서글픈 분할을 넘어서고 사회냐 개인이냐의 문제 설정도 넘어서는 데 있다.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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