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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2-06
    [2011-01-28] 영혼은 언제 병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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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지만, 만약 태어나야 한다면 궁벽한 산골에 가서 완벽하게 정직한 삶을 살고 싶다. 지난주 타계한 작가 박완서 선생은 생전에 이런 취지의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말, ‘궁벽한 산골’을 언급한 부분, ‘완벽하게 정직한 삶’이라는 대목 등은 박완서의 문학을 접할 기회가 있었던 사람은 물론 그럴 짬이 없었던 사람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고인의 영전에 얼른 용서를 구한 다음, 일종의 상상력 실험용으로 그 대목을 잠시 용도전환해보면 어떨까. 인간의 생사를 주재하시는 분이 우리에게 묻고 우리가 대답해야 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너는 인간으로 또 태어나고 싶으냐?” “태어난다면 지구 어느 구석, 어떤 집에?” “다음 생에서는 뭘 하고 어떻게 살 건데?”


    인문학의 초기 발생 지점의 하나인 고대 그리스인들의 입을 빌리면, 이 세 가지 질문에는 이런 답변들이 가능하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실레누스(“인간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차선은 얼른 죽는 것”이라 말한 신화 속의 현자)의 답변은 “사양합니다”일 것이 틀림없다. “다시 태어나요? 에구, 싫어요, 싫어.” 물론 반대 답변도 가능하다. “노예로 살고 개똥처럼 굴러도 다시 태어나 살아보고 싶소.” 젊은 나이에 전사한 영웅 아킬레스의 대답이다. 어디에 태어나고 싶으냐는 두 번째 질문의 경우, 견유학파 디오게네스의 답변은 이러하다. “아무데나 좋아요. 집이니 국가니 하는 건 내겐 아무 의미도 없소.” 그는 평생 집도 절도 갖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정치가 솔론이나 역사가 헤로도토스라면 생각이 다를 것이다. “그야 단연 문명국 그리스지요. 페르시아 같은 야만국은 웃돈 얹어줘도 싫습니다.”


    뭘 하고 살 것이냐에 관한 세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답변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플라톤=“다시 태어나도 철학을 하겠소. 철학만큼 고귀한 실천이 없지요.” 피타고라스=“개나 닭처럼 살아보고 싶어요. 그들도 인간의 형제니까요.” 마라톤 우승자=“운동선수를 하겠소. 인간의 탁월성을 발휘하는 데는 경기만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은 아니지만 여신 아프로디테의 대꾸도 하나 보탤 만하다. “사랑이죠. 난 퍼지게 연애하면서 살래요.”


    어디에 태어나고 어떤 집에 태어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장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시대도 그러하다. 탄생에 관한 한 인간은 완벽하게 수동적인 존재다. 이 수동성은 사람을 쓸쓸하게 하기에 충분하다. 탄생의 때와 장소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 ‘운’에 달렸다는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운은 우연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 우연성 때문에 어떤 사람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 치며 살고, 어떤 사람은 물에 빠진 개미처럼 연신 물 먹고 허우적거려야 한다면 그처럼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일도 없어 보인다.


    사람의 영혼은 언제 병드는가? 영혼을 병들게 하는 요인은 수백 가지이고 그 요인들의 성질을 따져 위계를 정하는 방법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다른 것은 일단 제쳐 놓고 우선 운의 문제에 관한 인문학적 사유의 한 자락을 딛고 말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요인들 중에 첫 번으로 꼽아야 할 것은 그 영혼이 운이라 불리는 우연성의 덫에 깊숙이 빠져 그로부터 벗어날 힘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다. 그럴 때 그 혼의 얼굴은 어둡고 목소리는 침울하다. 그를 가두고 있는 침울한 절망의 색조가 가감 없이 그대로 반사된다. 그 자신의 빛깔도 목소리도 갖고 있지 못한 혼은 수동태의 혼, 절망의 포로가 된 혼이다. 절망한 혼은 운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운의 예찬자다. 그의 불행을 결정한 것이 운이라면 그의 행복을 결정해줄 것도 운이라고 그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병든 영혼의 위기는 불행을 운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몇 배 좋은 조건 속에 태어나고 그 조건 덕분에 소위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경우는 영혼이 병들 가능성도 훨씬 더 크다. 자기보다 못한 운을 타고난 사람들, 그래서 인생의 초기 조건들의 불우성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깔보고 경멸하는 순간 그의 영혼은 병들기 시작한다. 그의 혼은 절망 때문에 병드는 것이 아니라 오만 때문에 병든다. 오만의 병은 절망의 병보다 더 고치기 어렵다. 그는 자신의 행운이 그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불우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 못해서 그렇다는 생각에 그는 깊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 행운의 영혼도 불운의 영혼처럼 운의 절대적 위력을 믿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잘 나가던 배가 엎어지듯 그에게도 침몰의 순간이 오면 그는 그 위기를 자기 책임 아닌 운의 탓으로 돌린다.


    인간의 삶이 우연성의 개입을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은 없다. 엉뚱한 때에 엉뚱한 곳에 잘못 배달된 소포처럼 시대를 잘못 만나고 장소를 잘못 만나 불우한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을지 모른다.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결정한 사항도, 선택한 사안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삶에 대한 나의 책임, 당신의 책임,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탄생은 내가 결정한 바 없고 선택한 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탄생 이후의 우리 삶은 우리가 책임져야 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생각하는 게 인문학적 사유의 첫 번째 과제라는 말의 의미다. 그 과제에 포함되는 것이 어찌 운의 문제뿐이겠는가.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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