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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이병률의 맛있는 책과의 만남

  • [네이버 200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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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수성찬(珍羞盛饌)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맛도 맛이려니와 푸짐하게 잘 차려진 음식을 말한다. 하지만 시대감각을 따르자면 이젠 식탁 위에 결코 많은 가지 수를 올려놓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예전만큼 먹을 것이 귀하거나 많이 먹는 시대가 아닌 것은 물론 손만 뻗으면 뭔가를 먹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뭘 먹을까 하는 선택 끝에 정해진 그것을 주문하거나 배달시키면 배고픔의 문제는 해결된다.

     

      이제 사람들은 ‘코스’가 아니라 ‘메인’을 좇는 시대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책이 그런 것 같다. 동서고금을 통해 우린 책을 많이 읽으면 좋다고, 책은 무조건 많이 읽어야 한다고 들어왔지만 조금 다른 내 견해로 그 보다 더 중요한 일은 이 쓸쓸한 세상에서 책 한 권을 찾고 만나는 일이다.

     

      평생 가슴에 품은 책 한 권이면 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든든한 밑천이 된다. 충분하다. 나를 흔들어 놓은 책. 나를 버티게 해주는 책. 그래서 남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하고 또 권할 수 있는 책.

      그러나 그 일은 쉽지 않은 일이며,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을 만난 것과 맞먹는 일일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평생 많은 책을 읽게 되더라도 절반은 기억에서 잊혀질 것이고 그 나머지 절반은 나에게 맞지 않거나 소화가 안 된 책일 것이며, 또 그 나머지 절반은 읽으나 마나한 책이기 쉽다. 

     

      그러므로 문제는 그 책을 찾아가는 고된 여정에 있다. 삶에 있어 딱 한 번, 한 권을 집어든 사람이 그 한 권으로 인생 최고의 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면야 행운이겠으나 그러기는 쉽지 않은 일. 그래서 많은 책을 읽어야한다는 진리를 떠올려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얼른 만나야한다. 그 책을 일찍 가슴에 품은 사람만이 일단 성공한 사람일 것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의 여정은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책 한 권을 찾아가는 일이다. 그건 역시나 작가 역시 스스로 죽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건 작품 한 권, 혹은 작품 한 편을 남겨야 하는 의무와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자. 기다리는 그것이 우연히 닥쳐올 것이라고 믿으면 안 된다. 곧 나에게 큰 행운이 생겨날 것이라고만 믿어서도 안 된다. 확률을 만드는 주체는 언제나 나였고 우리였다. 제대로 한 사람을 찾고 만나기 위해서는, 이 수많은 책들 가운데 나를 일으켜 세워주고 받쳐 줄 한 권을 책을 만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파 속으로, 책더미 속으로 첨벙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린 살면서 늘 그것이 문제였다. 뛰어들 것이냐. 피할 것이냐. 혹은 모른 척 할 것이냐.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읽은 책을 또 읽는 사람의 옆모습이다. 두 번도, 세 번도 읽을 수 있는 만큼 읽는 것. 그리고 그 책을 다 읽었으니 더는 읽지 않겠다며 멈추거나, 그치지 않는 사람. 책을 마치 소중한 사람처럼 아낄 줄 알며 다룰 줄 아는 사람. 자신은 비록 귀퉁이가 낡고 헐은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누군가를 위해 수도 없이 그 책을 사서 건네주곤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무엇이 와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다. 그 뭔가로 뭉쳐져 이미 강해진 사람이다.

     

      나는 최근 들어 어떤 독특한 느낌과 함께 시각적으로 눈길을 멈추게 하는 식기나 그릇을 보면 그것을 들어 밑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릇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나 접시 뒷면에 새겨진 회사 이름, 혹은 하다못해 나라 이름이라도 알게 되면 반갑고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한 시절 누구를 만났는가, 어떤 책을 가슴에 품은 사람인가에 따라 사람의 뒷면 혹은 밑면에 누구도 지우지 못할 뭔가가 새겨지게 마련이다. 그 ‘새겨짐’만으로도 진수성찬을 담을 자격은 충분하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 앞에서 그릇의 밑바닥을 들키는 게 아니라 은근히 자신의 그릇을 내비쳐 보이는 그 순간, 향은 퍼져날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 세상을 얻는 일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한 권이다. 그 한 권과의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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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률│시인. 서울 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펴낸 책으로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와 여행사진 산문집<끌림 (1994-2005, Travel Notes)>이 있습니다. 현재 '시힘'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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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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