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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이명랑의 변함없는 친구

  • [네이버 2006/05/03]
    dog-mrbookman

    이명랑의 변함없는 친구


    도서관은 늘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나는 변덕을 부려도 도서관은 늘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었습니다. 내가 찾아가면, 도서관은 제 품을 열어 손 때 묻은 책 한 권씩 꺼내주었지요.
    처음으로 도서관에 갔던 날을 기억합니다. 봄이었지요.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오전반 수업을 끝내고 건널목을 세 개나 건너 도서관을 찾아갔습니다. 여덟 살짜리 계집애가 혼자 도서관을 찾아가는 일은 모험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어른들은 모두 나보다 키가 컸고, 한결같이 나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어딜 가는 거냐고, 꾸짖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걷는 길이 왜 그렇게 무섭고 길게만 느껴지던지요.


    마침내 저기 도서관이 보였습니다. 발걸음은 빨라지고 가슴은 두근거렸습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도서관으로 뛰어 들어가 어린이 열람실의 문을 열었지요. 그곳엔 고요가 있었습니다. 어린이 열람실에 감도는 고요는 낯설기만 해서 충격과도 같았지요.


    내가 살던 곳은 장터였고, 장터는 장사꾼들의 걸걸한 입담과 시장 아낙네들의 악다구니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울고 웃고 떠드는 소리로 언제나 소란스러웠으니까요. 내 얼마 되지 않은 생애에 고요는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그 고요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가를 서성였습니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누군가 찾아와서 만져주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요. 이 세상에는 내 손길을 기다리는 존재도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요.


    나는 책 한 권을 뽑아들었습니다.


    어느 틈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져가고 있었지요.


    내 또래의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사내아이의 아버지는 개장수였지요. 이 동네 저 동네 돌아다니며 개를 잡아다 파는 개장수. 사내아이는 아버지가 부끄러웠습니다. 멀리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숨어버리곤 했지요. 어느 날, 사내아이의 아버지가 개장수라는 사실이 학교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내아이는 이제는 숨어버릴 수도 없게 된 것이지요. 그 사내아이와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그 동화책을 읽으며 울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열람실에서 우연히 뽑아든 동화책 속에서 나는 나와 똑같은 부끄러움을 가진 내 또래의 사내아이를 만났고, 그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났을 때는 그 사내아이와 어느새 친구가 되어있었습니다. 속내를 털어놓는 진정한 친구 말이에요.


    그 뒤로 나는 매일 도서관에 갔습니다. 떠들썩한 장터를 떠나와 어린이 열람실의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다보면, 세상의 그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딱 한 곳, 이곳에서만큼은 내 자리가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게 도서관에서 나를 가득 채우고 집으로 돌아오면, 다섯 식구가 아등바등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던 비좁은 월세 방도 더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넓은 들판과 가장 높은 성과 가장 아름다운 강과 가장 눈부신 불빛을 내게 전해주는 친구를 가진 사람이니까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친구와 싸우고 찾아가면, 도서관은 우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책을 읽어주었고, 사춘기가 되어 방황할 때는 나와 똑같은 처지의 소녀가 어떻게 삶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들려주었으며, 사랑 때문에 아파할 때는 사랑을 위해 흘린 눈물로 앞으로의 시간을 둥글게 감싸 안는 법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도서관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결코 생색을 내지도 않습니다. 시골집의 아랫목에 늘 깔려있는 이불처럼 따듯하기만 한 품...... 나는 그저 찾아가 그 품속에 얼굴을 묻기만 하면 되지요. 때로 울컥, 눈물이 나는 날, 그러나 기대어울 어깨를 찾지 못한 날에도 나는 도서관에 갈 겁니다. 그러면 도서관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왜 우니? 무슨 일이니? 다그쳐 묻는 법 없이 가만히 또 제 품을 열어줄 테지요. B

     


    lmr-mrbookman-mrbookman이명랑

    1973년 서울 출생
    1998년 장편소설 <꽃을 던지고 싶다> 출간 (웅진출판刊)
    2002년 젊은 문학인 창작지원금 수혜 (문예진흥원) 
    2002년 연작소설집 <삼오식당> 출간 (시공사刊)  
    2004년 장편소설 <나의 이복형제들> 출간 (실천문학사)  
    2004년- 2005년 계간 「작가세계」에 장편소설, <키싱 피버> 연재
    2005년 장편소설 <슈거푸시> 출간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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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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