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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야생초 편지' 황대권님의 책 이야기 '런던, 책벌레의 천국'

  • [네이버 200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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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권의 책벌레라면 영국의 런던만한 곳이 있을까싶다. 런던은 서울과 인구가 비슷한 대도시이지만 다양한 문화유산의 보전과 그 아기자기함이 서울과 비교가 안 된다. 영국 사람들은 자기네 문화전통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면서 옛 것을 웬만해서는 잘 고치려 하지 않는다.  한번은 런던대학 근처 타비스톡 공원에서 시대극 촬영하는 것을 보았는데 세트설치 담당자가 한 일이라곤 거리의 전기 가로등을 가스등으로 바꾼 것 밖에 없었다. 그만큼 런던은 예전의 아기자기한 거리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런던의 길거리를 걸으면서 골목마다 박혀있는 오래된 서점과 펍(pub:선술집)을 순례하는 것은 런던을 방문하는 책벌레들에겐 최상의 관광코스이다. 나는 관광이 아니라 유학 공부를 위해 런던에 2년 간 머문 적이 있다. 청춘을 몽땅 교도소 독방에 앉아서 책만 들여다보다가 세상에 갓 나온 내가 낯선 땅에서 갈 데라곤 오직 책방 밖에 없었다.

     

    첫 번째 들른 런던의 책방에서 내가 제일 먼저 산 것은 상세한 런던지도책과 무려 224쪽으로 된 <런던의 책방>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는 런던시 경계 내에만 600개 가까운 책방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머무는 동안 과연 얼마나 많은 책방들을 순례할 수 있을지 생각하니 흥분이 되어 잠이 잘 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으레 샌드위치 하나 싸들고 책방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책을 찾고 들여다보는 것이라 하루에 두 세군데 이상은 들르기 어렵다. <포일즈>같은 큰 책방에는 한 동안 아예 출근하다시피 다니기도 했다. 하도 오랫동안 책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머리에 피가 쏠려 책장을 붙들고 간신히 일어서는가 하면, 책을 들여다보다가 끼니때를 놓쳐 고픈 배를 움켜쥐고 길거리를 헤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행복했다.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으므로. 런던의 관광명소들은 특별히 찾아다니지 않았다. 책방 근처에 볼만한 곳이 있으면 쉴 겸해서 들르면 그만이었다.

     

    런던의 일반서점에 가보면 책의 진열이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 수가 있다. 한국에서는 잘 안 팔리는 장르인 전기와 역사가 책방의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를 지배한 나라와 지배당한 나라의 차이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역사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러한 역사를 일구는데 기여한 인물들의 이야기 또한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책방에는 늘 각종 전기와 역사서가 넘쳐난다. 그리고 <워터스톤>이나 <보더스>와 같은 대형서점의 또 다른 특색은 그 안에 카페와 책 읽는 공간이 있어서 고객이 마음대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일부 대형서점에도 내부에 카페가 있는 곳이 있지만 사지도 않은 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읽을 수는 없게 해 놓았다. 그것은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또는 지식의 공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우리보다 높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런던이 책벌레들에게 천국인 것은 단순히 책방이 많아서가 아니다. 책벌레들에게 일반서점은 아무리 많아도 별 볼일이 없다. 어딜 가나 똑같기 때문이다. 런던에는 세계 어느 도시보다 전문서점이 많다. 그것은 아마도 수백 년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를 지배하는 동안 다양한 분야에 많은 전문가들을 키워놓았기 때문이리라. 정치, 고서, 희귀본, 종교, 오컬트, 예술 및 공연, 건축, 디자인, 컴퓨터, 경영, 대안사회, 아동, 교통, 원예, 스포츠, 만화, 공상과학소설, 뉴에이지, 군사, 지도, 여행, 수공예, 외국어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전문 서점이 있다. 이 가운데 런던이 세계 최대의 국제도시임을 알려주는 책방들이 있다. 내가 체류기간 내내 가장 자주 들렀던 제3세계의 자주적 발전과 관련된 책만 파는 란 책방과 50여 개의 세계 여러 나라에 관한 책방들이 그것이다. 한 조사에 의하면 현재 런던에는 300개에 달하는 외국어가 쓰이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한 장소에 공존하고 있는지 상상이 될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런던에 가서 책방순례만 열심히 해도 전 세계의 문화를 어느 정도는 섭렵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런던 책방 순례의 백미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헌책방이다. 책방이 그렇게 많으니 헌책방도 당연히 많을 수 밖에. 때때로 화창한 봄날 동네 도서관이나 마을문고 같은 데서 길거리에 난전을 펼쳐놓고 오래된 책들을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재수 좋으면 여기에서 단 돈 몇 푼에 두꺼운 원예도감을 살 수도 있고 백 년 전에 출판된 유명 소설의 원본도 구할 수 있다.

     

    나는 2년에 걸친 런던의 책방순례를 통해 영국문화의 저력에 대해 깊은 외경심을 갖게 되었다. 예전에 단순히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집대성해 놓은 것 정도로 알고 있었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자본주의의 패권은 미국에게로 넘어갔지만 여전히 영국이 문화에 있어서만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책을 사랑하는 영국인의 습성과 마니아에 가까운 책방 주인들 때문이 아닐까.

     

    글 : 황대권│그림 : Bookman

     

    hdk-mrbookman바우 황대권

    생태공동체 운동가. 1955년생으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뉴스쿨 포 소셜 리서치(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제3세계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3년 2개월을 복역한 후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출소 후 전남 영광에서 농사를 짓다가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초청으로 유럽에 가서 한동안 인권활동을 했다. 영국에 있는 동안 슈마허 대학(Schumacher College)과 임페리얼 대학(Imperial College)에서 생태디자인 및 농업생태학을 공부하고, 2001년 10월 귀국하여 생태공동체운동센터를 설립하고 2004년 전남 영광으로 귀농하였다. 현재 '농.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과 교육위원장으로 생명평화운동을 펼치며 여러 매체에 생태공동체와 농업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있다.

     

    2002년 <야생초편지> 출간하여 MBC TV 느낌표 선정도서, 동아 조선 중앙 문화일보 등에서 '2002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저서 : <백척간두에 서서: 공동체 시대를 위한 명상(1991년 사회평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 황대권의 유럽 인권기행>, <야생초 편지> : 공저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 역서 <가비오따쓰>, <새벽의 건설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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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칼럼은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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