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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독서교육 정책 논란

  • [경향신문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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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Ⅲ-1 독서교육 정책 논란


    공교육에 흡수된 독서교육이 시행 전부터 거센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2007년 고등학교 1학년부터 학생부에 독서결과를 기록, 2010년부터 대학입학 전형에 반영하도록 한 교육부 입학제도 개선안 발표(2004년 10월)에 이어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3월말 독서교육 매뉴얼을 작성하고 추천도서목록까지 내놓자 독서운동 단체들이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 어린이도서연구회, 대한출판문화협회, 민족문학작가회의 등 16개 단체로 구성된 ‘바람직한 독서문화를 위한 시민연대’(이하 시민연대)는 지난달 27일 ‘서울시교육청의 독서매뉴얼과 추천도서를 전면 철회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불붙은 독서교육 시장


    지난해 3월 대통령 자문 교육혁신위원회 산하 대입특위가 ‘독서이력’ 도입 검토를 제안하고 교육부가 이를 담은 대입개선안을 마련하면서 독서교육은 학부모와 사교육업체 사이에 관심의 핵으로 떠올랐다. 독서교육을 주제로 한 단행본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가 하면 한우리, 대교, 재능교육, 한솔교육, 아이북랜드, 위즈북스 등 교육업체가 독서교육용 교재와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다.


    독서교육은 학교 현장에서 늘 강조돼 왔으나 대입개선안과 맞물려 폭발적인 위력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 서울시교육청의 발표가 불을 붙였다. 시교육청은 공정택 교육감이 올해초 공표한 ‘서울학생 학력신장’ 방침에 따라 독서교육을 강화하기로 하고 초등학교는 학년별로 1권씩, 중·고교(고1까지)는 국어·도덕·사회·국사·수학·과학·영어 등 7개 과목별로 1권씩의 독서지도 매뉴얼을 내놓았다. 또 교과수업과 연계되는 1,500여권의 추천도서 목록을 선정했다.


    이 도서목록에 대해 교육청은 필독서나 권장도서가 아니라 참고용 도서일 뿐이라고 설명하지만 일부 출판사와 서점이 상업적으로 이용하면서 짧은 시일 안에 새로운 형태의 교재로 변질됐다. ‘서울시교육청 추천도서’란 딱지를 붙이거나 ‘추천도서전’이란 이벤트를 열어 초조해진 학부모와 학생들의 눈길을 잡고 있다. 일선학교에서도 이 책들을 서둘러 구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책의 질이 떨어지거나 책 자체가 절판된 경우도 있어 잡음이 커지는 형편이다.


    서울시교육청의 독서매뉴얼과 추천도서목록 제작과정을 보면 이미 문제의 싹이 들어 있다. 독서교육에 대한 심각한 고민없이 학력신장 차원에서 교육청 산하의 각 교과연구회에 맡겨 3개월 만에 매뉴얼과 추천도서목록을 완성했다. 참가했던 교사들조차 책 선정에 불만을 가질 정도였다. 결국 교육혁신위원회의 ‘독서이력’ 아이디어부터 서울시교육청의 추천도서 목록 선정까지 불과 1년 만에 모든 일이 이뤄진 셈이다.


    ◇도서목록 찬반논란


    시민단체와 전문가, 일선교사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부분은 졸속 시행과 더불어 독서교육의 방법론이다.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 대표인 허병두 교사(숭문고)는 “교육당국의 정책발표가 즉각 일선학교에 전달되면서 입시교육에 앞장서는 학교일수록 올해 교육계획에서 독서교육을 강조하는 식으로 적극 반영하고 있다”며 “입시에 종속된 독서교육은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데다 기존에 쌓아놓은 독서교육의 토대마저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차원에서 시교육청이 주도적으로 추천도서목록을 만드는 일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그 책을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심어줘 독서의 획일화와 강제성을 부추기는 위험한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김대경 양재고 교사는 “어떤 책이 학생들에게 좋은 책인지 판단이 안서는 상태에서 일선교사들이 매뉴얼에 나와있는 책 목록을 맹신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며 “좋은 책 목록은 교사와 학생들이 책을 함께 읽으면서 수시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시교육청의 학년별·교과별 추천도서가 교육과정에 적합한지도 의문시된다.


    김도균 혜화초등학교 교사는 “특정한 성장발달단계에 맞는 책이란 가정 자체가 위험한 데다 오독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모비딕’은 6학년에게 적합한 책으로 돼 있지만 이 책들은 독자의 다?양한 논리적 단계에 따라 다양한 깊이로 읽힐 수 있다. 또 2학년 교과서 ‘민수의 책 읽는 자세’와 연계된 안데르센의 ‘전나무’, ‘단정한 옷차림’의 필독도서인 수지 모건스턴의 ‘엉뚱한 소피의 못말리는 패션’은 원래 책이 말하는 메시지와 교과서 내용이 전혀 엉뚱하게 연결된 사례다.


    ◇향후 전망


    서울시교육청은 독서교육 매뉴얼의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보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독서목록 자체를 철회하라는 시민연대의 주장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윤명숙 중등교육과 장학관은 “추천도서목록은 학생들에게 정보취득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라며 “절판도서 등 문제가 있는 부분은 연말에 수정하고 4개 교과의 독서지도 매뉴얼을 추가로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추천도서가 권장도서·필독서로 둔갑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필요하면 경고조치를 하겠지만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시교육청은 이번 독서지도 매뉴얼의 부록에서 독서인증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학생들의 독서결과를 객관적으로 측정한다는 취지의 독서인증제는 독서인증추진팀 구성, 학습도서(10권)·권장도서(20권) 목록 선정, 도서구입 및 독서지도, 1차평가, 시상 및 인증(수행평가 반영), 미달시 2차평가(독서지도 강화) 등의 수순으로 정리돼 있지만 구체적인 시행계획은 없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은 학생들의 독서능력 평가, 책의 등급평가, 교사들의 독서교육 준비 등 제반 여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독서인증제가 시행될 경우 독서교육을 사교육의 영역으로 떠넘기는 지름길이라고 판단, 극력 반대하는 입장이다. 실제로 지난해 ㅎ사교육업체가 독서새물결모임이라는 교사단체와 연계해 독서능력검정시험을 한 차례 시행했다가 시민연대의 반대에 부딪혀 홍역을 앓기도 했다.


    독서교육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하면서 대화 움직임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번 기회에 독서교육에 대한 폭넓은 의견수렴과 공감대 형성, 장기 정책과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 양측이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연대와 서울시교육청은 조만간 대화자리를 갖기로 했다. 교육부 역시 독서교육 연구모임 구성을 모색 중이다. 김정석 교육부 학교정책과 교육연구관은 “독서활동은 봉사활동과 마찬가지로 비교과영역이며 초기단계의 문제점에도 불구, 학교교육에 흡수돼야 한다”면서 “장기적으로는 생활기록부 반영보다 대학에서 독서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돼야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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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손 닿는 곳에 좋은 책을 놓아 두자


    어른들은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에 빠져서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탓할 수는 없다. 학원 과외나 학습지 풀이만을 강요하는 학부모들이나 입시만능의 사회 풍토, 책을 읽을 여건과 책읽기의 재미에 빠져들 기회를 마련해주지 않았던 학교와 선생님 등 어른들의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아이들의 손이 닿는 곳에 책을 놓아두고 읽을 수 있는 분위기만 만들어주면 아이들은 열심히 읽는다. 리모델링으로 쾌적한 공간과 좋은 책을 갖춘 학교 도서관에서는 한 달에 2,000권 이상의 책이 대출되며, 초등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좋은 책을 마련하고 책읽기로 이끌어주기만 하면 한 달에도 수십권씩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아이들이 좋은 책을 많이 읽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아이들 곁에 좋은 책을 준비해 두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도서관을 잘 만들어 좋은 책을 충분히 갖추고, 가정에서도 부모들이 좋은 책을 자주 사주어야 한다. 학원비나 학습지에 쓸 돈의 절반만이라도 책을 사는 데 쓴다면 자녀들이 지적·정서적으로 바르게 성장하리라고 확신한다.


    다음으로 할 일은 아이들을 책읽기로 이끄는 분위기나 문화를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생님과 부모가 먼저 책을 읽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또 아이들에게 책 속의 좋은 내용이나 멋진 구절을 소개하거나, 좋은 책을 찾아 권유해 줄 수 있어야 한다. 학교 도서관에서는 소식지나 학교신문, 홈페이지를 통해 책읽기로 이끌기 위한 다양한 홍보나 작은 이벤트를 하는 등 책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이 만든 독서매뉴얼이 논란이 되고 있다. 교육청은 선의로 만들었겠지만, 독서편식을 야기시키고 출판시장의 다양성을 훼손한다면 문제가 된다. 독서매뉴얼보다는 책읽기 붐을 일으키고 좋은 책 선택을 돕기 위해 다양한 책 정보를 제공하고, 누구든지 좋은 책을 추천할 수 있게 하며, 학생들이 느낌이나 소감을 쓸 수도 있게 하는 ‘독서정보 나눔 사이트’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21세기 지식기반사회에 도서관은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되어야 한다. 주5일제 시대에는 (학교)도서관이 학생과 주민들의 독서나 모임을 위한 좋은 문화공간이 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독서와 도서관에 좀더 관심을 가지고, 교육부와 문화부가 적극적이고 과감한 도서관 활성화 정책을 펼치도록 지원해야 한다. 아울러 이 땅의 모든 선생님과 학부모들이 먼저 책을 읽고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권유해 주는 문화가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


    안승문 서울시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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