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73
  • 2010-07-04
    [아우스터리츠] 소용돌이치는 현실의 환상적 재현

  • [책읽는 경향] 아우스터리츠
     배수아 | 소설가
     

    ㆍ소용돌이치는 현실의 환상적 재현

    실제로 우리는 걸어서 하룻밤에 이 거대한 도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거의 도달할 수 있고, 고독하게 걷는 것과 이 길에서 몇몇 밤의 유령들을 만난 것에 일단 습관이 되면, 그 다음에는 그리니치나 베이스워터 혹은 켄싱턴에 있는 수많은 집들의 어디서나 런던 사람들은 매일 저녁 오래전에 정해진 약속처럼 자신의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안전한 지붕 밑에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단지 누워 있을 뿐, 마치 과거에 광야에 난 길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과 같은 두려운 얼굴을 하고 땅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되지요, 라고 아우스터리츠는 말했다. …

     
    그때 나는 가파르게 깊숙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혹은 막 출발한 회색 창문 뒤에서 이전부터 내게 친숙한 얼굴들을 알아보았다고 생각했지요, 나는 이 낯익은 얼굴들이 항상 모든 다른 것들, 뭔가 사라진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고, 그들은 종종 여러 날 동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어요.

    실제로 나는 당시에 밤의 탐험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흩날리는 일종의 연기나 베일을 통해 이른바 줄어든 육체의 색채와 형태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빛바랜 세계에서 나온 형상들, …

    내 옆을 지나갈 때면 시선을 내리까는 1930년대의 의상을 입은 여자 행인들이었지요. (141~142쪽)

    아마도 제발트는 이런 식의 인용에 가장 적절하지 못한 작가에 속할 것이다. 그의 진술은 수많은 겹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의 문장은 어두운 설명의 미로를 즐겨 돌아가며, 다층적인 간접화법과 축약을 모르는 길고 반복적인 묘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난히 잠언류의 문구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취향을 고려한다면,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 중의 한 명이다. 제발트의 소설 <아우스터리츠>는 기억을 잃어버린 한 나이 든 남자의 오디세이며 동시에 낯선 고향을 찾아가는 독특하고 기묘한 형태의 정신적 귀향이자 여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발트의 세계를 완성하는 것은, 그의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용이 아니라 그가 진술로 구축해내는 소용돌이치는 현실의 환상적 재현, ‘제발트식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으리라.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