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95
  • 2010-07-28
    [부서진 사월] ‘원수도 환대’ 알바니아 산악으로의 초대

  • 경향신문은 '책 읽는 경향'을 통해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책 한 권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년째 쉬지 않고 내보내고 있습니다. 일간지 1면에 날마다 서평 형태의 칼럼을 싣는다는 것은 신문사로선 매우 이례적인 기획일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무척 의미 있는 일입니다.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책읽는사회'가 '책 읽는 경향'을 맡아 책 소갯글을 주선하기로 하였습니다.



    부서진 사월 | 이스마일 카다레 · 문학동네


    ‘원수도 환대’ 알바니아 산악으로의 초대
    ~임옥희 | ‘여성이론’ 편집위원~
    “어깨에 배낭을 짊어진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길손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는 우리의 손님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며, 그 순간 그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인물, 범할 수 없는 지배자, 입법자, 이 세상의 불꽃으로 변하는 거지. 이런 변신의 돌발성이야말로 신성의 특성이라 하겠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들은 가장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불쑥 나타나곤 하지 않았어?”

    바로 그런 식으로 손님은 알바니아인들의 대문 앞에 출현하는 거지... 몇 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전(全) 세대의 생존이나 소멸이 좌우될 수 있지. 산악 지방 알바니아인들에게 손님은 그런 존재라고. (117쪽)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낯설고 충격적이다. 이 소설은 ‘살인하라’는 명령에서부터 시작한다. 알바니아의 산악지방 주민들은 이슬람 관습법에 따라, 피에는 피로 혈세를 치른다. 그들에게 복수로서 살인은 정의의 실현이자 명예의 회복이다. 피가 피를 끝없이 불러온다는 점에서 이것은 전근대적인 잔인한 풍습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살인은 타인에게 바치는 최대의 경의처럼 보인다. 생명은 살해될 수 있으므로 신성한 것이 되고, 살해당하는 희생양은 신으로 격상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딜레마는 살인하라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 손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환대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에 있다. 설령 그 손님이 죽음과 파멸을 몰고 오는 적이자 원수라도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발밑이 흔들리는 아찔한 현기증과 아득한 시적 피곤을 느꼈다. 그것은 한 세계가 무너지고 그 세계의 잔해더미 속에서 또 다른 세계와 만나는 충격적인 경험과 다르지 않았다. 독자로서 우리는 아주 낯선 땅에 초대받은 손님임을 알게 된다.


    임옥희 | ‘여성이론’ 편집위원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