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00
  • 2010-08-04
    [시녀 이야기] 무더위 식혀주는 이야기의 힘

  • 경향신문은 '책 읽는 경향'을 통해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책 한 권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년째 쉬지 않고 내보내고 있습니다. 일간지 1면에 날마다 서평 형태의 칼럼을 싣는다는 것은 신문사로선 매우 이례적인 기획일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무척 의미 있는 일입니다.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책읽는사회'가 '책 읽는 경향'을 맡아 책 소갯글을 주선하기로 하였습니다.



    시녀 이야기 | 마거릿 애트우드 · 황금가지


    무더위 식혀주는 이야기의 힘
    ~이소연 | 덕성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오브글렌은 소매 속에 감춘 손으로 나의 팔꿈치를 꽉 붙잡는다. “계속 움직여, 못 본 척해.” 그녀가 속삭인다. 하지만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 바로 앞에 밴이 정차한다. 뒤편의 이중문이 열리자마자 회색 양복을 입은 <눈> 두 명이 훌쩍 뛰쳐나온다. 그들은 걸어가고 있던 한 남자를 홱 붙잡는다. 서류 가방을 든 남자, 평범하게 생긴 남자, <눈>들은 그 남자를 밴의 검은 몸체 측면에 메다꽂는다. 남자는 자동차에 붙어버린 듯이 사지를 쫙 펴고 늘어져 잠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자 <눈> 한 사람이 다가가 날카롭고 무자비한 일격을 날리자 남자는 푹 고꾸라져 하늘거리는 천 뭉치 같은 존재로 변해 버린다. 그들은 편지가 든 부대처럼 남자를 들어올려 밴 뒤에 싣는다. 그러더니 자기들도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밴은 떠났다. 몇 초 만에 상황은 끝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리의 차들도 통행을 재개했다.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287~288쪽)


    빨간 구두, 빨간 드레스, 빨간 장갑, 그리고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하얀 가리개, 빨간색만 아니라면 수녀와 같은 복장으로 극단적 통제하에 살아가는 ‘시녀’들의 이야기. 이 디스토피아 소설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오웰의 <1984>와는 또 다른 시각에서 인류가 자초할 수 있는 재앙의 한 시나리오를 담담하게 그려 보여준다. 너무 담담해서 처연하다. ‘시녀’들은 그 주인의 이름으로 불린다. 오브글렌은 글렌의 것이고, 오브프레드는 프레드의 것이다.

    그들의 주인인 ‘사령관’과 ‘아내’ 사이의 줄타기뿐 아니라 극단적 근본주의 기독교 정파의 독재체제가 지배하는 길리어드에서의 생존까지, 이들의 삶은 매 순간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추리소설도 공포소설도 아니지만, 천천히 따라 읽다 보면 무더운 하루를 서늘하게 식혀주는 이야기의 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소연 | 덕성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