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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06
    [조선일보 08-08-14] 여름을 꿀꺽 삼켜버린 도서관에 빠진 아이

  • "여름을 꿀꺽 삼켜버린 도서관"에 빠진 아이들?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에서 ''도심 1박2일'' 운영 "처음보는 친구들과 문제를 풀어가는게 즐겁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잭슨 폴록이라는 할아버지예요. 그런데 나이가 들고 기운이 없어서 더 이상 그림을 못 그린다고 기운이 쫙 빠졌어요. 여러분들이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지난 10일 오후 10시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 옆뜰.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의 부탁을 받은 어린이들이 "네!"하고 함성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려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앞에 놓인 플라스틱 통에 담긴 물감을 붓에 찍고 바닥에 놓인 도화지를 색깔로 물들였다. 물을 뿌려서 후후 불고 흔들어보며 깔깔대는 아이들.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바닥에는 '추상화' 두 점이 완성됐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그려낸 '추상화'가 신기한 듯 손으로 만져본다. 한밤중 주택가와 동산에 둘러싸인 도서관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산책 나온 주민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도서관 근처를 기웃거렸다.?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이 10일 밤부터 11일 아침까지 진행한 '도서관에서 하룻밤을…' 프로그램 모습이다. 동대문구 지역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도서관에서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마련된 다양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즐기고, 책을 벗삼아 말 그대로 하룻밤을 지새우는 '야영'이다. 올해의 타이틀은 '여름을 꿀꺽 삼켜버린 도서관'. 작년 처음 진행한 뒤 '정말 재미있었다'는 어린이들의 후일담이 부모와 학교 선생님들 사이로 널리 퍼져나갔고, 이 달 초 선착순 신청(참가비 1만원)을 시작하자마자 20분도 넘지 않아 '조기매진'됐다.?

    이날 오후 8시에 도서관에 모여든 50명의 아이들은 학교도 학년도 제각각이라 좀 서먹서먹하고 조용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도서관 어린이소극장에 모여 각자 소개를 하고, 네 개의 모둠(조)으로 짜이자 수다 떨고 장난치는 등 분위기는 학교 교실처럼 즐겁고 소란스러워졌다.?

    유치원생 티를 벗지 못한 1학년 꼬맹이들부터 어른 티가 부쩍 나는 의젓한 6학년 언니·오빠들까지 12~13명씩 속한 4개의 모둠에는 '지혜' '보물' '여름' '꿀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린이 도서실인 '지혜의 보물섬'과 주제인 '여름을 꿀꺽 삼켜버린 도서관'에서 따온 것이다.?


    이번 프로그램의 '알맹이'는 오후 8시 반부터 두 시간 가까이 펼쳐졌던 책놀이 '사라진 명화를 찾아서'다. 각 모둠별로 도서관 안팎 곳곳에 만들어진 코너를 다니면서 유명한 그림 속의 장면을 실제 재현하면서 퀴즈를 풀고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는 '모험'이다. 프로그램은 도서관 사서들과 극단 '사다리'의 배우들이 준비했다.?

    도서관 옆뜰에서는 잭슨 폴록의 추상화를 흉내 내 그렸고, 1층 로비에서는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이중섭의 그림 장면을 따라 하며 노래를 부르고 단체 줄넘기를 했다. 2층 종합자료1관 앞에서는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그림처럼 갈색 천을 몸에 두르고 어우러지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돼갔다. 전곡초등학교 3학년 유원준 군은 "조용히 책 읽는 곳인 줄만 알았던 도서관에서 밤새 놀 수 있다는 게 정말 신난다"고 말했고, 전동초등학교 5학년 김세영 양은 "처음 보는 친구들과 힘을 합쳐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게 즐겁다"고 말했다.?

    '모험'을 끝낸 아이들은 오후 11시부터 어린이 소극장에 모여 도서관에서 준비한 방울토마토와 오렌지 주스 등 밤참을 깨끗이 비웠다. 집이었다면 슬슬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지만 신나는 프로그램은 계속됐다.?

    잠옷에 셀로판지를 붙여 잔뜩 멋을 내고 패션감각을 뽐내는 '파자마 패션쇼'가 끝나고, 잠옷차림으로 서가로 가서 선생님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을 읽었다. 그동안 오늘은 어제가 됐고, 처음 본 친구들과 도서관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아이들은 하나 둘 서가 사이에 펼쳐진 이부자리에 누워 조용히 꿈나라로 향했다. 한 달 전부터 이 프로그램을 준비해온 도서관 사람들 입가에도 미소가 머금어졌다. 이우정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 관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 "도서관에서 연중 마련하는 여러 가지 독서·교양 프로그램들만 잘 활용해보세요. 절대 비싼 돈 들여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아도 될 겁니다."?

    밤은 깊어갔고, 사방을 뒤덮은 매미소리 틈바구니에서 간간이 귀뚜라미 소리가 경쟁이라도 하듯 들려왔다. 프로그램 타이틀대로 도서관은 아이들의 무더운 여름 밤을 시원스럽게 꿀꺽 삼켜버렸고, 독서의 계절 가을이 저만치 다가와 있었다.?


    [정지섭 기자?xanadu@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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