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대한민국] Ⅲ-6. 출판산업
현주소
출판산업은 혼자 굴러가는 외바퀴가 아니다. 시장 논리에만 내맡기면 기형과 편중으로 궤도를 이탈한다. 양서라고 해서 반드시 잘 팔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이쪽 시장의 오래된 딜레마다. 아쉽지만 독자는 쉽게 편식에 길들여진다. 평균적인 대중이라면 인문학적 지식보다는 자극적이거나
실용적인 콘텐츠에 더 솔깃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출판산업은 한 국가 지식문화의 젖줄이다. ‘보이지 않는 손’도 좋지만 ‘보이는 인공의 힘’도 필요한 분야다. 기초 학문의 인프라가
없는 경제 강국의 위상이란 졸부의 그것처럼 공허할 뿐이다. 국가가 출판산업을 지원해야 하는 당위가 여기에 있다. ‘시장’이라는 초원에 무조건
방목하기보다는 길을 안내하는 목동의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하는 것이다. 법과 시스템을 새로 만들거나 리모델링하자는 출판계의 거듭된 제안은 요즘
들어 더욱 탄력을 받고 있다.
먼저 우리 출판산업의 체질부터 진단해보자.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인문·사회·자연과학 분야 출판사는 온통 아우성이다. 사업자의 고전적
덕목만으로는 결코 성공을 예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학술출판의 길은 언제나 벤처였다.
◇양서 10권중 4권 돈때문에 포기
최근 대한출판문화협회(이하 출협)가 한국출판연구소와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해 설문조사한 결과는 적나라하다. 학술도서를 발간하는 출판사
51개사가 설문에 응했다. ‘좋은 학술 원고임에도 채산성이 약해 출판을 포기한 경험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평균적으로 10권 중 4권은 그렇다는
답이 나왔다. 학술출판사 사장들이 밑지는 장사를 할 수 없어 부지기수로 양서 생산을 포기하고 있는 셈이다.
‘신간 학술도서가 1년 이내에 70% 이상 팔린 비율’은 11.8%에 불과했다. 1년 평균 판매비율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응답은
78.5%에 달했다. 조사결과 학술도서 중 번역 도서의 비중도 전체의 32.0%에 이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외국 번역서 의존율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 국내 필자군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외국 서적이라야 겨우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현실론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출판연구소 백원근 차장은 이 조사결과에 대해 “학술출판은 지식정보사회 발전의 ‘줄기세포’ 격”이라며 “많은 출판사가 설문에 응하지 못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우리 출판의 현실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하는 의미있는 자료”라고 말했다.
출판계의 조직적 움직임이 부활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출협은 최근 8명으로 구성된 출판산업발전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 출판산업의 인프라를
재정비해보자는 취지다.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은 2002년 제정된 ‘출판 및 인쇄진흥법’ 개정. 이 위원회 위원인 김인호 바다출판사 사장은
“기존 법률은 선언적 조항만 있을 뿐 이를 실질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근거는 담고 있지 못하다”며 “이 때문에 작금의 출판산업 지원이란 것이
주로 행사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출판진흥위원회 설립 추진
‘출판 및 인쇄진흥법’ 개정의 핵심은 ‘출판진흥위원회’(가칭)의 신설이다. 정부 지원 하에 민간 차원에서 운영하는 영화진흥위원회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체계적인 출판 진흥책을 수립·진행하기 위해서는 실행력을 갖춘 상시적 출판진흥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출협의 입장이다.
출판진흥위원회는 1999년에 추진하다 무산된 ‘출판진흥기구’의 틀을 상당부분 옮겨와서 새로 손을 본 형태다.
김사장은 “출판진흥위원회가 설립되면 도서관 정책에서부터 출판유통에 이르기까지 제반 사항을 조정 및 조절할 수 있는 센터로서 기능을 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출협은 더 나아가 명목상 존재할 뿐인 ‘출판유통심의위원회’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간행물윤리위원회’의 존재 근거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실질적 기능이 폭력·음란서적을 가려내는 일에 국한된 간행물윤리위원회에 40명 가량의 직원을 두고 34억원이나 되는 예산을 쓸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다. 이런 조직들을 축소·통합해 출판산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재정비하자는 것이다.
법을 개정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국회의원이 제출한 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는 ‘의원 입법’과 정부 해당 부처가 관련 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국회에 제출하는 ‘정부 입법’이 있다. 각각의 장·단점은 있지만, 절차는 전자가 훨씬 간단하다.
출판진흥위원회를 신설해달라는 요구에 대해 국회 문화관광위는 일단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쪽이다. 열린우리당 문광위 간사인 우상호 의원은
“출판계 인사들이 제출한 법률 개정안은 상당히 발전적 제안이라고 본다”며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화관광부는 신중한 입장
그러나 문화관광부는 아직 조심스럽다. 문광부 허윤 출판산업과장은 “기구 신설은 신중히 생각할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출협은
영화진흥위원회를 모델로 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시장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사안들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전했다. 또 이 사안과 관련해
의원입법으로 법률이 제정되는 것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법제처와 기획예산처, 재정경제부의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추후 갈등의 소지를
줄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다.
정부가 지적하는 현 출판산업의 가장 큰 맹점은 통계 부실이다. 과학화, 계량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허윤 과장은 “업종의 통계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산업정책을 펴기 힘들다”고 말했다. 출판계도 이 사실은 인정한다. 출판시장 규모도 정확히 산출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시장 규모를 일부에서는 2조5천억원이라고 하고, 다른 측에서는 5조원으로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각론은 다를 수 있지만 출판 관련 법률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총론에는 정부와 출판계 사이에 큰 간극은 없어 보인다. 정부의 출판산업 지원은
국민의 문화교육지수를 높인다는 국가적 과제와 맞닿아 있다.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금은 한국 출판의 세계화 전략을 짜는 일에 착수해야 할
때라고 출판계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조장래 jo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