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5-08-19]
매주 토요일 오후 3시가 되면 경기 안산 원곡고등학교 소회의실에서 특별한 모임이 진행된다. 삼삼오오 모여든 주인공은 안산 소재 원곡고교와
강서고교 재학생 20여명. 안산지역 고교생들의 독서모임 ‘바인’ 회원들이다. 매년 3월 신입생을 상대로 새내기 회원을 뽑는데 벌써 13기째다.
29살이 된 1기와 현재 1학년인 13기는 띠동갑이다. 어떤 모임이건 강력한 동기가 없으면 쉽게 명멸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입시 중압감에
시달리는 고교생들이 독서모임 바인을 이렇게 오랫동안 끌어온 힘은 어디에 있는 걸까.
회장을 맡고 있는 원곡고교 2학년 이보람양은 ‘바인’의 최대 장점으로 “시험기간이라고 해서 빼먹지 않고 1주일에 한번씩 꼬박꼬박 모이는
회원들의 열성”을 꼽았다. 현재 두 학교에서 1학년 16명, 2학년 9명이 활동중이다.
“회원 선발의 특별한 기준은 없어요. 다만 책에 대한 관심이 있고 모임을 적극적으로 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를 보고 판단해요.”
◇현대 단편소설 읽고 열띤 토론=바인(vine)의 원뜻은 덩굴식물의 줄기. 이 줄기가 서로 얽혀 성장하는 것처럼 책을 통해 지식과 감동을
쌓고 넓은 안목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해가자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토요 독서모임은 치열한 토론의 장이다. 2~3시간 동안 찬반 양론을 펴거나 각자의 아이디어를 개진한다. 사회자는 2학년 회원들이 매주
번갈아가면서 맡는다.
이보람양은 “양적인 면에서 부담이 없는 현대 단편소설을 주로 읽을거리로 정한다”면서 “국내물과 해외물을 적절히 섞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리의 ‘무녀도’, 최인훈의 ‘광장’에서부터 미치 앨봄의 ‘천국에서 만난 다섯사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고른다. 때로 동화책을 읽고
토론을 하기도 한다. ‘꽃들에게 희망을’(트리나 폴러스) 같은 해외 명작동화가 그 대상이었다.
“일단 토론에 들어가면 찬반 의견이 마구 쏟아져요. 인물 성격에 대한 평도 나오고, 만약 나라면 어떻게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회원도
있어요. 소설속 단어의 의미에 대한 지적도 나오고요.”
책을 읽기가 힘든 시험기간에는 ‘시사토론’으로 대체하는 편이다. “입시안 변경으로 내신 부담이 부쩍 늘어난 1학년 회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북한 핵문제나 이라크파병과 같은 핫 이슈를 토론 주제로 선정하기도 해요. 그러나 대학 입시의 ‘언어영역’을 잘 치르기 위한
수단으로 바인을 이끌어가지는 않습니다.”
이 활동이 결과적으로 언어영역에 상당히 도움이 되긴 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모임의 취지가 퇴색해버린다는 취지에서다.
바인 부회장인 강서고교 2학년 윤희열군은 “이전에는 책을 읽은 뒤 혼자 생각하고 정리했었는데 다른 학생들과 토론을 하면서 나 자신의 빈틈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며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책 중에는 독재자와 사회주의 사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2002년과 지난해 바인 회원들이 각각 안산시와 경기도가 주최하는 독서토론대회에 나가 2등과 1등을 차지한 이후 학교측의 반응도 좋다.
원곡고교가 바인 회원들에게 교사(校舍)의 한 부분을 빌려주고 있는 것이 한 예다.
◇끈끈한 유대=바인의 또다른 특성은 재학생과 졸업생 간의 독서 유대가 유달리 깊다는 점이다. 졸업한 선배들이 수시로 토요 정기 모임에 나와
토론에 동참하는가 하면 갖가지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강원도로 합동 단합회를 다녀오기도 했다. 1~13기까지 전체 회원은
120명에 이른다. 인터넷 다음카페(cafe.daum.net/youthvine)에 가보면 이들의 와글와글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
재학생과 졸업생을 합쳐 바인의 전체 회장을 맡고 있는 대학생 이정재씨(20)는 “고교시절 바인 활동을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결실”이라며 “선후배간의 예의와 큰 유대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부수적인 소득”이라고 말했다.
“고3이 되면 활동을 접게 되는데, 한번은 너무 궁금해서 고3 회원들이 후배들 토론 장면을 몰래 엿보았던 적도 있습니다.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토론의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등을 후배들에게 지적해주곤 하죠. 토론에 너무 몰입하다 보면 지엽적이거나 내용과 동떨어진 쪽으로
빠져들기도 하거든요. 그리고 졸업생들도 앞으로 1년에 4차례씩 모임을 갖기로 했어요.”
과연 부모들은 이들의 독서모임을 흔쾌히 승낙하는 편일까. “공부에 지장이 갈까봐 솔직히 걱정을 하시는 편이지만 많이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는 게 회원들의 반응이다.
바인 회원들의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모임 장소를 새로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원곡고교 회의실은 강서고교 회원들에게는 거리도
멀고 심리적으로도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시립 관산도서관 소회의실을 이용했다. 그러나 도서관측은 이 공간을 다른 용도로
활용해야 한다며 지금은 사용을 불허하고 있다.
“고교생들의 건전한 독서모임인 만큼 시립도서관을 빌려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회장 이보람양을 비롯한 모든 회원들의 간절한 소망이다.
조장래 기자 jo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