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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2/02/26]
[도서관을 늘리고 채우자]1. 유권자가 나선다"도서관을 새로 늘리고, 도서 구입비를 늘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런 계획
을 세우는 동안, 제발 있던 도서관이나 없애지 말아주십시요. 요즘 교실 수를 늘린다는 이유로 먼저 도서관부터 없애는 초등학교들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한 도서관들이 없어지고 있다구요." "말이 대학 도서관이지 쓸 만한 책이 정말 없습니다. 컴퓨터를 아무리 갖다
놔야 뭐합니까. 디지털화할 책이 있어야죠. 사서로서 학생들더러 책 보러 오라기가 부끄럽습니다." 지난 6일 대통령자문 교육인적자원정책위원회가
세종문화회관 세미나실에서 개최한 '도서관 정보인프라 활성화 방안 정책 토론회'. 1시간여에 걸친 정부측 기획자와 주제토론자들의 발표에 진지하게
귀기울이던 60여명의 방청객들은 질의시간이 시작되자 질문보다는 하소연들을 쏟아놓았다.
사실 바로 전날 문화관광부가 "2011년까지
공공도서관을 주민 6만명당 하나꼴인 7백50개로 증설한다"는 공공도서관종합발전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이런 정책토론회가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정부측의 태도는 이전에 비해 대단히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 현장의 사람들에게 정부안이란 것은 아직도 한가한 탁상공론처럼 보일
뿐이었다.
◇'도서관=독서실'=최근 책읽기 캠페인이 도서관 문제와 엇물려 단순한 교양운동을 넘어 정치권을 압박하는
유권자 운동의 형태로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같은 현실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인구당 도서관 수를 비교해 보자. 유럽 선진국들은 주민 4천명이
있는 지역, 즉 웬만한 아파트 단지마다 공공도서관이 하나씩 있고 일본만 해도 5만명에 하나 이상이다. 반면 우리는 11만명에 하나(도서관 협회
2000년 통계)다. 이것도 전국 평균이고, 서울 등 대도시에서는 인구 30만명에 하나는 예사다.
여기에 우리 공공도서관 전체의
연간 도서구입비 2백억원은 미국 하버드 대학도서관 한 곳의 연간 도서구입비인 2백75억원(99년 기준)에도 못미치는 실정이다.

문제는 정작 그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조차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 "공공도서관이요? 자기 책 싸들고 가서 시험공부하는 독서실 아닌가요?"
이런 인식은 무엇보다 어렸을 때부터 필요한 자료와 보고싶은 책을 언제든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공공도서관에서 얻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 학교도서관살리기 국민연대 대표 한상완(연세대.문헌정보학)교수는 "전국 1만5백개 초.중.고교 가운데 사서교사를 갖춘
학교도서관은 전체의 1%인 1백50곳에 불과하다"면서, "초.중.고 학교도서관 설치율이 78.6%라는 정부 통계는 허구"라고 잘라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도서관에서의 자료 조사와 실제 수업이 밀접히 연계돼 진행되는 선진국 수업방식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치맛바람'이 고질적 사회문제일
정도로 교육열이 높은 데 비해, 정작 교육 문제를 도서관 등을 통해 공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의 무관심="공공도서관이 많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출판 및 공공도서관 정책과
관련, 대선출마를 선언했거나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는 민주당.한나라당.자민련 정치인 9명에게 몇가지 설문조사를 한 결과 나온 답변들도 하나같이
초보적인 인식수준을 넘지 못했다. 가장 최근 읽은 책이 지난해 가을에 산 책이라는 대선 주자도 있었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후엔 시간이
없어 거의 책을 못 읽었다"는 것이다. '독서가 취미'라고 하는 다른 대선 주자들도 대개 정치권 입문 이전의 취미일 뿐이다. 현안이나 정책과
관련된 자료집이라도 충실히 읽는다면 다행이다.

반면 선진국 정치인들은 출판 및 도서관정책에 매우 적극적이다. '책을 싫어한다''무식하다'는 평까지 받는 부시 미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독서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는 부시 행정부는 벌써부터 내년도 예산안에 도서관 전문사서 확충 및 재교육을 위해 1천만 달러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퇴임 후 그의 이름을 딴 공공도서관을 짓는 것은 이제 미국의 전통처럼 돼 있기도 하다. 또 지난해 말 일본 국회에서 통과된 '어린이의
독서활동 추진에 관한 법률'은 다름아닌 여야의원들의 합동단체 '어린이와 청소년의 미래를 생각하는 의원 연맹'이 직접 연구조사한 프로젝트에 근거해
만들어진 것이다.
◇도서관 살리기를 유권자 운동으로=이에 따라 문화개혁 시민연대.민족문학작가회의 등 8개 문화단체와
시민단체들로 구성돼 지난해 6월 발족한 '책읽는 사회 만들기 국민운동'(이하 국민운동)은 선거의 해를 맞아 유권자 운동 차원의 캠페인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도서관 문제를 국책사업으로 선정해 관련사업에 대한 예산을 혁명적으로 늘릴 것을 요구하고, 오는 4월 지자체 선거부터 후보들이 도서관
관련 정책을 내놓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또 국민운동측은 한국출판인회의 등과 연계,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책의 날'인 4월 23일을 '책을
선물하는 날'로 정하고 독서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일깨운다는 계획이다.
배영대/
김정수 기자
balance@joongang.co.kr